주부 박모(65)씨는 얼마 전 대장내시경 검사에서 직장 위쪽 S자모양 ‘결장’에 암이 발견돼 수술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평소 육류를 많이 먹고 운동은 거의 하지 않았던 게 마음에 걸렸다. 암 수술 후 회복이 어렵지 않을까 걱정이 컸던 박씨는 의료진 권유로 대장암 수술 조기 회복 프로그램인 ‘이라스(ERAS)’에 참여키로 했다.
수술 날짜가 정해지고 1주일 전부터 박씨는 프로그램에 따라 외래진료에서 인바디 검사를 받고 체성분과 영양 및 전신상태를 점검했다. 나이 탓인지 영양 상태가 대체로 고르지 못하고 ‘근육감소증’과 부종도 약간 있는 것으로 나왔다. 영양상담을 통해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는 식습관을 들였고 재활의학과 의사와 상담해 스트레칭과 걷기 등 운동으로 줄어든 근육 기능을 끌어올렸다. 수술 이틀 전 입원한 박씨는 수술 2시간 전까지도 탄수화물 보충음료와 영양음료를 섭취했다. 일반 대장암 수술의 경우 수술 1~2일 전에는 물을 포함해 완전 금식하는 게 보통이다.
복강경으로 암 제거 수술을 잘 끝낸 박씨는 수술한 지 4시간 뒤부터 물을 마시고 수술 전처럼 탄수화물 보충음료와 영양음료를 복용했다. 남편과 병원 복도도 잠깐씩 걸어다녔다. 이 또한 대장암 수술 뒤 2~3일 금식하고 움직이지 않는 일반적인 관행과는 달랐다.
수술 다음 날 점심부터는 죽을 먹었고 15분 이상 걷기, 30분 이상 침대 밖 활동하기, 하루 3회 껌씹기 등도 실천했다. 박씨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빠르게 건강을 되찾고 수술 후 3일 만에 집에 갈 수 있었다”며 만족해 했다.
위암에 이어 국내 두 번째로 발생이 많은 대장암은 항문부터 시작해 후복막에 위치한 직장, 그 위 S자결장에 생기는 암을 통칭해 부른다. 중앙암등록통계에 따르면 2016년 기준 2만8127명의 대장암 환자가 발생했다. 50~70대 남성 환자가 절반 가량을 차지한다.
고령화시대에 접어들며 노인 암 환자가 늘고 있고 대장암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환자의 동반 질병이 많고 영양이나 신진대사가 좋지 않아 암 수술에 따른 위험도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중장년층도 서구적 식습관, 운동 부족으로 고지혈증, 고혈압 등 만성질환을 많이 앓고 있어 수술 부담이 적지 않다. 환자의 면역력이나 영양상태, 동반질병 등은 조절이 어렵고 수술로 생길 수 있는 합병증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암 수술 조기회복 프로그램인 이라스가 몇몇 의료기관에 도입돼 대장암과 위암 환자 등을 대상으로 이뤄지고 있다. 특히 가톨릭의대 서울성모병원은 지난해부터 모든 대장암 수술 환자에게 적용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대장암 수술이 필요한 환자의 수술 전·후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며 신체의 항상성을 유지해 합병증을 막고 빠른 회복을 돕도록 고안됐다.
서울성모병원 대장암센터 이인규 교수는 17일 “암 수술을 받으면 대장 기능이 떨어지고 건강 회복이 더디게 되는데, 수술 전·후 환자의 적절한 영양 섭취와 운동을 통해 치료 효과를 극대화하고 수술로 발생할 장의 기능 손실을 최대한 줄이려는 것”이라며 “특히 노년기 ‘근육감소증(사르코페니아)’이 암 수술 후 회복력과 밀접히 관련있는 것으로 최근 밝혀지고 있어 가장 신경쓰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이라스는 외과와 마취통증의학과 의사, 간호사, 영양사, 약사, 운동치료사 등이 함께 참여한다.
가장 큰 특징은 환자가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대장암 수술 2시간 전까지 환자는 탄수화물 보충음료를 복용한다. 단백질, 무기질, 오메가3 등이 들어있는 영양음료는 장 청소(관장) 후 균형이 깨진 장내 세균 조성의 정상화를 촉진한다.
대장암 수술에 있어 금식은 대개 1~2일, 마취를 위해선 6~8시간 전에 필히 거쳐야 할 과정으로 알려져 있다. 이라스는 금식 시간을 최대한 줄여 환자의 불편함을 덜고 수술 후 빠른 회복을 돕는다.
이 교수는 “탄수화물 보충음료는 섭취 후 2시간이 지나면 위에 거의 남아있지 않아 수술과 마취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서 “수술 후 올라가는 인슐린저항성도 떨어뜨려 합병증을 줄이고 수술로 인한 감염 반응을 낮춰 빠른 회복을 돕는다”고 말했다.
수술 후 금식도 최소화한다. 수술 후 4시간이 지나면 물을 마실 수 있고 다음 날부터 죽이 제공된다. 장 운동을 촉진하고 방귀가 나오는 시간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 이 역시 합병증을 감소시켜 환자 컨디션 향상에 도움된다. 수술 1~2일 전부터 굶기고 수술 후 방귀가 나올때까지 물도 마시지 못하게 하는 기존 방식과는 큰 차이점이다. 일반 대장암 수술은 대개 퇴원하기까지 5~7일 걸리는데, 이라스 프로그램을 적용하면 2~4일 퇴원을 앞당길 수 있다.
서울성모병원이 2017년부터 이라스 프로그램을 적용한 환자는 860여명이다. 이 교수팀은 이라스 프로그램을 적용한 대장암 수술 환자 82명(2017년)과 미적용 환자 214명(2006~2009년)을 비교 분석한 결과 이라스 적용군이 대조군에 비해 백혈구 수 정상화에 필요한 기간이 더 짧았고, 수술 후 염증 표지자 수치가 감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수술 후 합병증이 줄고 그 만큼 회복이 빨라 조기 퇴원이 가능해졌다는 의미다. 이 교수는 “이라스는 대장암의 수술 치료에 식이·운동 등 다양한 치료 활동을 더해 수술 후 환자 삶의 질을 높이는데 목적이 있다”면서 “다만 암이 전이돼 여러 장기를 잘라내는 수술이라면 결과 예측이 힘든 만큼, 이라스를 적용하지 않는게 좋다”고 말했다.
글·사진=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