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해도 3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는데, 3년이 지난 지금도 살고 있잖아요. 난치암 투병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긍정적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 금천구에 사는 이화(59·여)씨는 조기 발견과 치료가 어려운 췌장암을 두 번 경험했다. 식당일을 했던 2017년 가을 체중이 급격히 빠지고 눈과 얼굴이 노래졌다. 오줌도 갈색으로 나와 황급히 병원을 찾았다. 췌장의 머리 부분에 암이 발견됐다. 암세포가 자라면서 담관(쓸개관)을 눌렀고 담즙이 흘러 황달이 온 것. 병기는 1기에 해당됐다. 수술로 췌장의 70%와 암이 퍼질 우려가 있는 주변의 담낭, 담관, 십이지장까지 절제했다.
1년 5개월이 흐른 지난해 2월 수술 부위에 암이 재발했다. 이번엔 수술이 불가능해 항암치료를 택했는데, 그게 주효했다. ‘폴피리녹스’라는 항암제를 8개월간 투여받은 후 영상검사에서 암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효과가 나타났다. 다만 항암제가 독한 탓에 극도의 피로감과 무기력감, 온몸 염증 등을 겪었다.
그러던 중 유전자 검사에서 브라카(BRCA) 돌연변이가 확인돼 그걸 타깃으로 한 경구용(먹는) 항암신약(올라파립)으로 바꿀 것을 권유받고는 올해 2월부터 지금까지 복용하고 있다. 표적 항암제여서 일반 항암제 보다 부작용이 훨씬 덜했다. 이씨는 이 항암신약을 쓰게 된 ‘국내 1호’ 췌장암 환자였다.
이런 표적 항암제 효과와 그녀의 긍정적 삶의 철학이 더해져 췌장암을 이겨내는 큰 힘이 되고 있다는 게 주치의의 설명이다. 국립암센터 국제암대학원대 소화기내과 우상명 교수는 23일 “폴피리녹스가 종양 관해(암이 줄어듦)를 유도하고 올라파립이 그 효과를 유지하는 걸로 판단된다. 부작용이 심한 약 대신 사용해 환자 삶의 질을 높이는 의미도 크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주변 췌장암 환자 중에 나보다 상태가 좋았는데, 먼저 세상 떠나는 걸 보면 항상 누워만 있거나 우울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매일 2만보씩 걷는 등 운동과 건강한 식이습관을 지키려 노력 중이다. 그녀는 “암세포한테도 ‘이왕 왔으니, 너도 나를 너무 괴롭히지 말고 나도 너를 미워하지 않을테니 함께 가자’며 마음을 다잡고 있다”고 했다.
걸리면 몇 달 못가 죽는다?
흔히 ‘걸리면 몇 달 못가 죽는다’고 알려진 췌장암을 꿋꿋하게 극복해 나가고 있는 이씨의 투병기는 11월 췌장암의 달을 맞아 비슷한 처지의 암환자들에게 희망을 던져준다.
췌장암의 각종 지표를 보면 어두운 면이 대부분이다. 위암 간암 자궁경부암 등 상당수 암이 감소 추세임에도 췌장암은 1999년 전국 단위 암통계 산출 이후 매년 증가하고 있다. 중앙암등록통계에 따르면 2017년에 7032명이 새로 췌장암에 걸렸다. 주요 암 10개 가운데 발생률 8위다. 전년(9위)보다 한 단계 올라섰다. 다음 달 발표될 2018년 암등록통계에서도 증가세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5년 생존율은 12.2%(2013~17년 기준)로 주요 암 중 꼴찌다. 완치를 기대할 수 있는 수술이 가능한 경우(1·2기 단계)는 20%에 그친다. 나머지 80%는 상당히 진행돼 수술이 거의 불가능한 3·4기에 발견된다. 이 경우 진단 후 평균 생존율은 수 개월에 불과하다. 우 교수는 “이미 진행된 병기에선 항암제나 방사선 치료에 대한 반응이 극히 낮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1999년 이후 췌장암에 걸린 뒤 치료중이거나 완치된 사람(2018년 1월까지 생존자 기준)도 1만1776명이 있다. 진단 후 1년 이하 생존자가 4384명, 1~2년 1937명, 2~5년 2379명, 5년 이상 생존자는 3076명이다.
장기 생존의 가장 큰 비결은 암 전이가 이뤄지지 않은 낮은 병기에서 조기 발견해 수술받는 것이다. 여기에 최근 개발된 유전자 기반 표적 항암제와 면역치료 등 새로운 치료법들이 재발 혹은 진행된 암환자 치료에 시도되면서 수년간 10%를 밑돌던 5년 생존율을 끌어올리는 데 한몫하고 있다. 췌장암 5년 생존율은 1993~95년(10.6%)을 빼곤 줄곧 8%대를 유지하다 2013~17년 두 자릿수(12.2%)로 상승했다.
3기 이상 췌장암의 경우 완치를 목표로 하는데 한계가 있지만 폴피리녹스 같은 항암제의 적극적 사용이나 항암방사선(방사선과 항암치료 병용), 양성자 치료 등을 통해 장기 생존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이런 선제적 치료의 반응이 좋을 경우 완치 목적의 수술을 나중에 시행하기도 한다.
실제로 주변 혈관을 침범한 3기 췌장암 환자 68세 여성은 국립암센터에서 적극적인 항암 및 방사선치료를 먼저 시행한 후 수술에도 성공했다. 현재 재발 없이 장기간 추적 관찰 중이다. 3기 췌장암인 73세 여성도 ‘젬시타빈’이라는 항암제로 1년 반 이상 치료받은 뒤 최근 사용 허가된 항암제 ‘오니바이드’로 1년 6개월간 치료받으며 3년 넘게 살고 있다.
췌장암의 경우 수술 전후 적절한 항암치료가 치료 성적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다. 특히 수술 후 폴피리녹스 항암치료를 받은 환자군은 중간 생존기간이 54.4개월(3년 생존율 63.4%)로 가장 좋았다는 연구보고가 저명 학술지(NEJM)에 실렸다. 또 췌장암 치료제로 20년 만에 나온 ‘오니바이드’의 경우 기존 항암제에 실패한 환자의 2차 치료제로 권고되고 있다. 다만 아직 건강보험 급여가 되지 않아 경제적 부담이 큰 게 걸림돌이다.
유전자 기반 맞춤형 항암, 치료율 높여
표적항암제 올라파립은 BRCA유전자 변이가 있는 ‘전이성 췌장암’ 환자의 유지요법(암이 자라지 않게 함)으로 가능성이 확인됐다. BRCA변이는 유방암, 난소암 등에서 많이 발견되지만 췌장암과도 관련 있는 것으로 연구결과 밝혀졌다. 태생적으로 BRCA변이를 가진 췌장암 환자의 경우 올라파립 치료 후 무진행 생존 기간이 의미있게 연장됐다. 췌장암 위험이 높은 유전성 암 유전자는 전체 췌장암 환자의 약 3%에서 발견된다.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박준오 교수는 “유전자 기반의 이런 정밀의학 치료가 췌장암 치료율과 생존율을 개선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근래 주목받는 면역항암제나 암백신, 종양 특이적 항체 등을 이용한 최신 면역치료법들이 췌장암에 적용되고 있어 생존율의 추가 향상 효과가 기대된다. 다만 아직은 초기 연구단계다.
우 교수는 아울러 “완치 또는 장기 생존하는 췌장암 환자는 정신적으로도 건강해 치료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특징을 보인다. 평소 삶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보이고 가족들도 적극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다”고 조언했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