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전화 한통을 받으면서 권오현(32)씨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2014년 4월16일 오전 9시께, 여수로 출장 가던 권씨에게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오천이가 탄 배가….”
곧바로 차를 돌려 안산으로 돌아갔다. 텔레비전에서 “전원 구조” 보도가 나왔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미심쩍었다. 무작정 진도로 내달렸다. 도착해보니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권오천 학생 여기 있습니다.” 밤늦게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동생을 만난 곳은 영안실이었다. 어이없고 화가 나 눈물도 안 나왔다.
삼남매 중 맏이 권씨와 막내 오천이의 나이 차는 꼭 10살이다. 권씨는 대학과 군대 때문에 집을 오래 떠나 있었다. 과묵한 오천이는 막내라고 어리광 부리는 법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둘이 살갑게 어울린 기억이 별로 없다. 그래선지 더 미안하고 아쉬웠다. 사고 한해 전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신 터라 어깨가 더욱 무거웠다. 세월호 유가족 대책위원회 일을 맡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를 괴롭힌 건 떠나간 동생이 아니었다. “보상금 얼마나 받았냐” “시체팔이 하냐” 같은 공격이었다. 충격을 받아 대인기피증에 폭식증까지 생겼다. 먹기만 하면 자꾸 토해 몸무게가 30㎏이나 빠졌다. 2015년 말 혼자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왕복 1천㎞를 걸으며 마음을 다독였다. 2주기 즈음 오천이가 갔어야 할 제주도 수학여행 코스를 돌다가 깊은 상실감과 마주했다. 그 뒤 맨날 술로 살았다. 극단적 선택까지 했다가 나흘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2016년 말 <제이티비시> 예능 프로그램 <힙합의 민족2>에서 치타와 장성환이 세월호 추모곡 ‘옐로 오션’을 부르는 걸 봤다. “밖에 누구 없어요? 벽에다 치는 아우성” 대목이 뒤통수를 쳤다. ‘제3자가, 좌파 프레임으로 타격을 입을 수도 있는 대중가수가 이러고 있는데, 난 뭐 하고 있나.’ 한때 가수를 꿈꿨던 그에게 조그마한 희망이 생겼다. ‘내 얘기를 노래로 만들어 부르면 희생자들을 더 오래 기억해주지 않을까?’
음악학원에 다니며 곡 쓰는 법을 배웠다. 언젠가 잠들려 하는 순간, 뭔가가 확 지나갔다. 그 악상을 다듬고 노랫말을 붙여 틀을 잡은 뒤 4·16 가족합창단 일로 알게 된 윤영준 피디에게 도움을 청했다. 홍준호(기타)·강수호(드럼)·최훈(베이스) 등 정상급 세션 연주자들이 기꺼이 동참했다. 윤종신의 ‘좋니’를 작곡한 포스티노는 음원 믹싱·마스터링 작업을 했다. 권씨는 ‘오현’이란 이름으로 지난 11일 디지털 싱글 ‘매 순간’을 발표했다.
“별일 없이 잘 지내는지/ 아프지 않고 웃고 있는지/ 네가 떠난 이 공간은/ 닿지 않는 빛 때문에 늘 어둡네/ 별일 없어 잘 지내는 난/ 아프지 않고 웃고 있는 난/ 함께 웃던 그날들이/ 언젠가 날 아프게 할까 봐/ 가끔 너를 밀어내곤 해.”
지난 14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권씨는 “동생에게 띄우는 편지를 담은 노래지만 연인의 이별 노래,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을 위한 노래로도 들리게 중의적으로 가사를 썼다”고 했다. 더 많은 이가 듣고 공감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동생 팔아서 음반까지 내냐”는 공격이 쏟아질까 두렵기도 했지만, 상처받더라도 응원하는 사람들을 믿고 끝까지 해보자고 결심했단다.
“동생에게 못 해준 게 많아 미안했는데 나중에 하늘에서 다시 만났을 때 당당하고 싶었어요. 여러 사람에게 힘이 되는 음악을 하다 왔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사실 노래를 만들고 부르면서 오히려 제가 위로받았어요.”
권씨 오른팔에 새긴 ‘리멤버 2014. 04. 16’ 글귀와 노란 리본이 눈에 띄었다. “이거요? 어느 순간 갑자기 동생 얼굴이 생각 안 나더라고요. 안 되겠다 싶어 문신을 새겼어요. 잊지 않으려고요.” 그는 이제 노래로 동생과 함께했던 ‘매 순간’을 기억하려 한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