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사람들이 땅에 금을 긋고 ‘내 땅, 네 땅’을 나누기 시작했을까? 부동산 등기제도가 언제 생긴 지는 모르겠지만, 땅에 관한 소유권을 주장한 시기는 아주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이 인간이기 이전, 아니 생물이 처음 등장하던 시기다. 사실 세포막의 원형이 생기던 시절부터다. 세포막의 기능은 세포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 얇은 막의 안쪽은 내 것’이라고 주장하던 세포가 원시 바다를 헤엄치던 때부터, 우리는 자신의 영역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영역 안으로 허락 없이 들어온 녀석을 쫓아냈다. 텃세의 기원이다.
여기는 내 땅이다
유리 안드레예비치 지바고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의 저택에는 여러 사람이 집주인 허락 없이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다. 혁명정부가 대신 허락해준 것이다. 지바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소설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이다. 배경은 다르지만, 소설 《오싱》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태평양 전쟁 패망 후, 혼란한 상황에서 두 가족이 한 집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지금이야 등기부 등본을 보면, 땅의 소유주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등기소가 모두 불타버린다면? 그래도 괜찮다. 각자 자신의 집문서, 땅문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서 따위는 개의치 않고 ‘외적’이 쳐들어온다면? 무작정 안방으로 들어와서 ‘오늘부터 여기가 내 집이다’라고 우길 수도 있을까?
텃세란 세력권을 뜻한다.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면 즉시 달려가서 싸움을 벌인다. 같은 종이면 서로 협력해야 할 것 같지만, 정반대다. 다른 종에는 텃세를 잘 부리지 않는다. 성도 가린다. 종종 이성에게는 텃세를 부리지 않고 관대하다. 오히려 유혹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성끼리는 아니다. 같은 땅을 공유할 수 없다.
영토란 먹이와 짝짓기, 포식자 회피, 양육을 위한 공간이다. 자신의 터를 선선히 다른 이에게 내주는 이는 아마 짝을 얻을 기회를 잃고, 필경 자식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맹렬하게 자신의 땅을 쟁취하고, 외부인의 침입을 막던 조상의 후손이 우리다.
등기소가 불타고 집문서가 사라지면, 사람들은 몽둥이를 들고 땅을 지킬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텃세 다툼은 종종 죽음에 이르는 치열한 싸움이 되곤 하는데, 아마 인류의 조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터를 지키려는 까마귀의 싸움과 국토를 수호하려는 군인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같다.
텃세의 경계
물론 텃세를 부리지 않는 종도 있다. 일정한 장소에 머무르지만 다른 개체가 들어와도 본체만체하는 경우도 있다. '행동권'만 있는 경우다. 아예 이주를 끊임없이 지속하면서 ‘우연이 아니라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종도 있다. 노마드(유목민)다.
하지만 많은 종은 특수한 영역을 정해두고, 침입자를 적극적으로 방어한다. 좁은 영역을 세력권으로 지키면서, 그보다 넓은 영역은 행동권으로 구분하는 종도 있다. 세력권은 우리 집, 행동권은 우리 마을 정도라고 할까?
이런 현상은 척추동물에서 흔히 나타난다. 척추동물 모든 강에서 나타나며, 무척추동물 중에서도 게나 거미, 곤충 등에서 나타난다. 특히 개미의 영토 수호 의지는 정말 경이로운데, 텃세를 위해 특별하게 만들어진 병정개미가 진화하기도 했다. 개미 집단의 세력권은 종종 수천 킬로미터에 이르기도 한다.
인간의 세력권 경계는 다양한 층위를 이룬다. 개인이라면 자신의 방이다. 가족이라면 자신의 집이다. 이렇게 부족과 마을, 국가로 텃세의 경계가 넓어진다. 그 경계에는 방문이든, 대문이든, 철조망이든 분명한 구획이 지어진다. 남의 세력권에 허락 없이 들어가면 흔히 공격 행동이 일어나는데, 대개는 침입한 사람에게 잘못을 묻는다. 인간 사회의 법과 제도 중 상당수는 텃세에 관한 세세한 규칙이고, 경찰과 군대는 그러한 텃세를 공식적으로 유지하는 병정개미다.
텃세와 전쟁
텃세를 부리는 것은 아무래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한 번쯤은 텃세를 경험한 적이 있을 텐데, 그리 유쾌했던 적은 없을 것이다. 모두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고, 다 같이 두 팔 벌려 환영해주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러나 아무에게나 안방을 내주지 않듯이, 텃세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간 사회에서 텃세란 종종 ‘합의 이상의 세력권 행동’으로 규정된다. 길거리 요지에서 노점을 할 권리나 한여름 계곡에서 자릿세를 요구하는 행동이 부당한 이유다. 그러나 돈을 주고 산 자신의 땅에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합의된 텃세다.
세력권을 독점하는 텃세는 아주 비용이 많이 드는 행동이다. 세력권 방어 비용이 세력권을 유지해서 얻는 이득을 초과해야만 텃세 행동이 진화할 수 있다. 만약 세력권을 통해 얻는 이득이 막대하다면, 다른 개체의 세력권을 추가로 얻으려고 할 수도 있다. 전쟁의 기원이다.
침팬지는 종종 인간 사회의 전쟁에 준하는 폭력적 행동을 벌이는데, 목적은 영토 확장이다. 세력권을 넓히는 것이다. 살해와 강간이 이어진다. 원시 인류의 전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조상의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전사의 구호는 ‘우리 땅과 우리 딸을 지키자’였다. 침팬지 전쟁은 수년 이상 지속하고, 상시적인 국경 순찰이 지속된다. 종종 한쪽이 다른 쪽을 절멸시킬 때까지 지속한다. 인간의 전쟁도 흔히 그렇다.
세력권 빌려주기
앞서 말한 대로 세력권 유지는 아주 비용이 많이 든다. 그래서 종종 세력권의 소유자는 자신의 세력권을 독점하기보다는 ‘공유’하려고 한다. 아니, 다른 개체와 공유하면 그게 무슨 ‘텃세’란 말인가? 그러나 세력권을 공유하는 경우에도 분명 ‘소유권’은 특정 개체에 존재한다.
검은턱할미새는 흔히 다른 새가 자신의 세력권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다. 먹이가 풍부하면, 혼자 모든 먹이를 다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위성’ 개체의 침입을 허락하고, 세력권을 같이 방어하는 편이 유리하다. 이들은 터를 같이 쓴다. 그리고 같이 지킨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그러나 먹이가 줄어들면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다. 위성 개체는 세력권이 없다. 어제까지 사이좋게 지내던 ‘주인과 손님’의 관계가 냉랭해진다. 세력권을 소유한 개체는 위성 개체를 밖으로 내쫓는다. 닉 데이비스의 연구에 의하면, 세력권 공유는 부수적 상리공생의 결과에 따른 현상이다. 확실한 이득이 존재해야 공유가 일어난다.
전세나 월세라는 경제적 현상도 일종의 세력권 빌려주기다. 예전에는 한 지붕 밑에서 여러 가족이 같이 사는 일이 적지 않았다. 화장실이나 부엌, 마당은 집주인과 세입자가 같이 썼다. 도둑이 들면 공동으로 집을 지키고, 겨울이 되면 김장도 같이 했다. 세력권 방어와 먹이 취득 행동을 공동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집주인과 세입자다. 상황이 안 좋아지면 짐 싸서 나가야 하는 쪽이 누군지는 분명하다.
세력권으로서의 부동산
집은 사는 곳이 아니라, 사는 곳이다. 한때 유행했던 말이다. 좁은 국토를 나누어 쓰자는 것이다. 다들 부동산을 소유하려고 하니까 아파트 값만 오르고 점점 사는 것이 팍팍해진다는 주장이다. 이상적이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단칸방이라고 해도 ‘자신만의 세력권’을 가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세력권의 조정 과정에는 격렬한 세력권 행동이 나타난다. 텃세다. 지키는 자와 새로 가지려는 자 사이의 싸움이다. 싸움은 일방적이기 어렵다. 양쪽 모두 손해다. 세력권 사이에 이른바 세력권 분계가 생긴다. 아무도 살지 않는 일종의 비무장지대(DMZ)이다. 세력권 공유는 좀처럼 일어날 수 없다. 자연의 세계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원칙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텃세 격화로 인해서 아무도 살지 않는 세력권 분계가 생기는 것은 슬픈 일이다.
세력권은 단지 힘으로만 지배되는 엄혹한 자연의 질서가 아니다.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 주디 스탬프스 교수에 따르면 세력권은 개체의 체구 등 전투 능력 외에도 선점권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먼저 터를 잡은 자의 이득(prior residency advantage)’다. 인간 사회의 소유권도 이런 기준을 따른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도, 집주인에게 매각을 강요할 수 없다. 워렌 버핏이 전 재산과 바꾸자고 해도, 집주인이 안 팔겠다면 그만이다.
인간의 역사는 터를 둘러싼 끝없는 싸움의 기록이다. 먼저 터를 잡은 자의 선점권이 다른 종류의 영향력과 충돌할 때 격렬한 점화 반응이 일어났다. 역사책은 그때마다 점점 두꺼워졌다.
텃세가 없는 세상
인간 사회에서는 텃세가 주로 ‘불법적인 세력권 행동’를 지칭한다. 그러나 자연의 세계에는 불법과 위법이 없다. 텃세는 자연스러운 행동 전략이다. 사실 인간도 텃세를 폭넓게 인정한다. 민법에 규정된 세세한 규정은 텃세를 둘러싼 권리 관계를 명확하게 하고, 법의 테두리 내에서 정돈된 세력권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법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민법의 원칙은 ‘텃세를 부리지 않는 개체는 터를 포기하는 것이다’라는 생태학적 원칙과 동일하다.
하지만 아파트값이 너무나도 비싸다. 혹시 선점권을 너무 과도하게 보호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인간이니까 이제 새로운 공유의 원칙을 세울 수도 있을까?
안타까운 말이지만, 성공하기 어렵다. 우리는 동물과 신의 중간에 있는 반신반수의 존재가 아니다. 그냥 동물이다. 인간만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수 있다는 식의 오만함은 늘 거대한 비극으로 이어졌다. 인간 행동의 진화적 기원을 인정해야만 한다.
혹시 자연의 세계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놀랍게도 자연스럽게 텃세가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 개체의 수가 적고, 전체 환경의 조건이 양호할 경우다. 살 곳이 넘쳐나는데, 굳이 내 땅을 지키겠다고 해봐야 이득이 없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환경이 열악해서, 텃세를 부려도 얻는 것이 없는 경우다. 황무지에 철조망을 쳐봐야 철조망값만 아깝다. 구석기 인류의 고고학적 흔적에는 세력권 행동이 유난히 적게 관찰되는데, 아마 이런 생태학적 조건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인위적으로 세력권을 유지하는 비용을 높이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세금을 왕창 물려서 기존의 세력권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개체군 밀도가 높아져서 침입자가 늘어나는 경우다. 터의 주인이 수시로 바뀌는 현상이 생긴다. 새롭게 터를 얻은 개체의 행운도 오래 가지 못한다. 선점권이 약해지면, 세력권을 둘러싼 경쟁이 점점 치열해진다. 짝짓기 기회나 먹이가 부족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속 사진가들이 좋아할 만한 역동적인 현상이 많이 벌어진다. 하지만 분명 평화로운 세상은 아니다.
※필자소개
박한선.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진화인류학 및 진화의학을 강의하며, 정신장애의 진화적 원인을 연구하고 있다. 동아사이언스에 '내 마음은 왜 이럴까' '인류와 질병'을 연재했다. 번역서로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 《진화와 인간행동》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 《행동과학》, 《포스트 코로나 사회》를 썼다.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parkhanson@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