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는 ‘미안합니다’ 하면 그만이죠. 한국에서는 패가망신하잖아요. " 서정진 셀트리온그룹 회장은 ‘절박감’이란 표현을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최근 조선비즈가 주최한 헬스케어 이노베이션 포럼 기조연설을 위해 찾은 그와 환담을 나누는 자리에서였다.서 회장은 기업인이 부도를 내면 너무 힘들게 되는 한국의 현실이 되레 절박함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는 기조연설에서 그게 의학은 커녕 약학 전공자 한명없이 모인 6명이 5000만원 들고 창업한지 20여년만에 순이익이 세계 제약업계 30위에서 35위안에 드는 그룹을 만든 배경이고, 무에서 유를 만든 한국의 저력이라고 했다. 한국의 부도시스템을 뜯어고쳐 실패를 용인하는 미국식 시스템을 따라가야한다고 듣고 그리 써왔던 기자에게 그의 이날 얘기는 사뭇 다르게 들렸다. 신체포기 각서로 사채를 쓰느라 떼 갈 장기가 더 없었다는 과거 그의 스토리가 떠올려지기도 했다. 절박함은 셀트리온의 문화가 된 듯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항체치료제 개발을 위한 임상을 위해 루마니아로 직원들을 보내고 있다고 소개한 서 회장은 하루 8시간 바이러스와 함께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파견할 수 없어 자원을 받고 있다고 했다. 떠나는 직원들에게 회사 동료와 가족들은 "살아서만 돌아와 달라"라고 했다고 한다. 셀트리온은 지금 코로나 치료제 개발을 위해 전쟁을 하고 있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었다. 서 회장은 합병하기로 한 셀트리온 3개 제약사의 순이익 합계가 내년엔 2조원으로 세계 제약업계 순위 20위에 드는 게 목표라며 우리 젊은이들에게 아무것 없어도 도전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는 점을 자부했다. 한국을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이끄는 많은 우리 기업들 역시 그랬다. 경영학의 구루 피터 드러커가 1996년 미국 비즈니스 매체 잉크(Inc)편집장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을 기업가정신 1등 국가로 꼽으며 내세운 것도 기업들이 무에서 유를 만들었다는 이유에서다. 일본이 지배하면서 교육을 억제해 실질적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없고,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된 나라에서 세계 일류산업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서 회장은 올해말 은퇴하고 손쉽게 피 검사를 해 원격의료 인프라를 만드는 스타트업을 만들어 도전한다고 했다. "잘되면 세계 70억명이 이용하는 병원이 한국에 들어서는 것"이라고 했다. "65세인 제가 치매 걸리기 전까지 몇년을 일할지 모르겠지만 정신연령은 젊은이들과 같다"는 서 회장은 "헬스케어의 다음세대를 위해 내 정열을 다 바치고 싶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미래에셋증권 창업자 박현주 회장이 대우증권을 인수하기로 한 2015년 12월 기자회견에서 "이병철 정주영 두 회장이 오늘날 삼성과 현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꿈을 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끊임없는 혁신과 도전으로 한국을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만들었지만 최근 도전과 투자를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고 한 발언이 떠올랐다.절박함과 도전에 대한 야성이 서 회장을 성공한 기업인으로 만든 셈이다. 그룹총수까지 한 사람이 왜 스타트업을 하냐는 주변의 물음에 그는 "기회가 아까워서"라고 답한다고 했다.중국에서 창업 20년만에 매출 80조가 넘는 회사로 키운 알리바바를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고, 지난해 55세에 퇴임한 마윈 역시 절박감과 도전을 중시해왔다. 기업간 전자상거래 플랫폼으로 시작한 알리바바 성공의 일등공신인 온라인 결제시스템인 알리페이와 온라인쇼핑몰 타오바오를 두고 지금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 만들었다고 했다. 마윈은 알리바바에서 은퇴했을 뿐 교육 등 하고 싶은 일에서는 계속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직원 주주 회사에 도움되는 일이 중요하고 실적 같은 수치보다 명분이 중요하다는 서 회장의 원칙도 돈을 쫓을 게 아니라 사회문제를 해결하면 돈은 따라오게 된다는 마윈의 지론과 맥이 통한다. 물론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성공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환경은 계속 바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 회장의 멋진 은퇴 선언을 보면서 절박감과 끊임없는 도전이 갖는 가치를 되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