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국내외 주요 흐름과 이슈들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깊이 있는(deep) 지식과 폭넓은(wide) 시각으로 분석하는 심층 리포트입니다. 바이든 시대 분야별 특집에 이어 한일관계도 전망해봅니다.
최근 박지원 국정원장과 김진표 한일의원연맹 회장이 연이어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와 만남을 가지면서 한일관계 개선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박지원 원장은 파격적인 한일공동선언을 제안하면서 도쿄올림픽에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미·일의 돌파구를 만들자고 했다. 이어서 김진표 회장도 한일정상회담을 촉구하며 현금화 모라토리엄(일시 중단)을 제안했다.
이런 연장선에서 23일 문재인 대통령은 신임 주일본 대사에 4선 출신의 '일본통' 강창일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내정했다. 문 대통령이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의 새로운 내각이 출범함에 따라 한일관계를 풀어보겠다는 의지를 신임 대사 내정으로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례적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스가 총리의 집권 직후에 한일은 강제징용 배상 문제 해결을 한중일 정상회담의 조건으로 언급하는 등 대립각을 세운 바 있기 때문이다.
한일 양국이 대화를 시도하는 배경에는 동맹국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미국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의 탄생이 영향을 주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트럼프 대통령과는 달리 중국·북한 등에 대항하는 한미일 안보 축과 동맹을 중시하고 있다. 이는 한일관계 개선에 긍정 요인이 될 것은 분명하다. 미국 민주당 정부는 2014년 2월 오바마 전 대통령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대립했던 한일 양국을 중재한 경험도 있다. 바이든 정부도 동맹의 복원을 주창하는 만큼 한일의 대립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한일 대화의 추진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 입장에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추진에는 미국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내년 도쿄올림픽에서 남북, 북미, 북일을 엮어 평화 무드를 만들려는 문재인 정부의 전략적 발상도 일본과의 대화 필요성을 높이고 있다. 또한 강제징용문제의 현금화 조치가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한일 양국 모두 피해를 입는다는 위기의식도 한일 대화가 성사되는 이유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악화되었던 한일관계가 개선되는 경우는 미국의 압력, 이익을 중시하는 여론의 변화, 그리고 전략적 필요성 등의 흐름이 거세질 때였다. 최근 한일간 대화 움직임도 이러한 환경의 변화가 배경이 되고 있다.
한국과 다른 일본의 셈법
한일관계 개선의 필요성이 강제징용문제 해결로 이어질 지는 의문이다. 한일 만남에서 절박성은 보이지 않고 아직도 상대방이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주기를 바라는 태도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 예로 스가 총리는 "한국 측에서 징용공(강제징용 피해자) 문제의 진전된 입장을 제시해 줬으면 좋겠다"라고 밝혀 이전의 입장에서 한치의 진전도 보이지 않았다.
일본의 외교과제에서 한일관계의 개선은 우선순위가 매우 낮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이든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 되면서 스가 총리의 우선적 외교 과제는 미국과 함께 ‘인도 태평양 전략’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스가 총리의 최대 목표는 미국과의 관계를 안정화시키면서 아베처럼 대미관계를 발전시킨다는 안심감을 일본 국민에게 어필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일본은 인도 태평양 구상 나아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한국이 참가하기를 희망하지만,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 또한 현실이다. 게다가 바이든 정부의 등장으로 인도태평양전략과 TPP에서의 일본 역할 확대에 대한 기대감마저 갖게 되었다.
또한 한일 협력의 우선과제인 북핵문제에서도 최근 일본은 한국에 의존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이 북핵문제에서 '보텀 업(Bottom-up)' 접근을 취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남북관계의 급진전은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시기에는 문재인 정부가 북핵문제의 촉진자 역할을 하면서 남북문제의 급진전을 가져왔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일본인 납치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북한 비핵화 과정에서 소외되었다는 초조함이 있었다. 그러나 바이든 정부의 등장으로 일본인 납치문제는 일본이 여유를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게다가 일본은 한국의 중재가 없더라도 일본인 납치문제에서 직접 북한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도쿄올림픽에서 북한을 설득하여 남북미일 협력을 추진하겠다는 한국 정부측 주장에 일본이 소극적인 이유이다.
그리고 강제징용문제에서는 ‘한국이 해결해야 한다’는 일본의 인식이 한일관계 개선의 구조적 장애물로 작용한다. 게다가 ‘한국과 타협을 하면 더 양보를 해야 한다’는 뿌리 깊은 불신은 한일관계를 어둡게 한다. 특히 외교 경험이 별로 없는 스가 총리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직접 관여하여 실패하였다는 인식도 한국에 대한 불신감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한다. 따라서 스가 총리는 아베 전총리처럼 이념에 매몰되지는 않지만, 한일관계의 개선에는 신중함을 갖고 있다.
바이든 정부시기에 일본이 바라보는 한일관계의 셈법은 문재인 정부와 다르다. 안타깝게도 ‘아베 전 총리는 신념 때문에, 스가 총리는 전략적이어서 한일관계는 어렵다’는 말이 맞아가고 있다. 당분간 스가 총리가 한일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올 가능성은 매우 적다는 것은 분명하다. 앞으로 일본 스가 정권은 강제징용문제에 대해 한국이 해결해야 한다는 기존의 주장을 취하면서 한일관계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는 자세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한일관계개선 가로막는 국내정치일정
강제징용문제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자존심의 대결은 결국 한일 양국의 이익, 전략마저 실종된 상태로 만들었다. 앞으로 한일 양국의 갈등에 따르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한일 양국 모두 과거사는 관리하며, 이익은 확대하고, 전략은 공유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바이든 정부는 한일관계 개선을 바라지만 기본적으로 양국 문제는 역사 문제이기 때문에 미국이 개입할 여지가 많지 않다. 그리고 한일 양국이 화해할 의지가 없으면 미국의 개입이 있어도 한일 양국의 갈등은 재현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일 양국이 ‘솔로몬의 지혜’로 강제징용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최근에는 한일 양국의 정상들조차 한일관계를 북한문제의 관점에서 보거나 국내정치의 유불리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해져 한일관계 개선은 우선순위에서 도외시된 것이 현실이다. 올해 안에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방향성에 타협을 하지 않는다면 한일 파국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은 내년 4월 대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보궐선거가 있고, 7월에는 대선 국면으로 들어가게 된다. 정치권이 반일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일본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스가 총리는 내년 9월 임기내 선거를 치루지 않으면 안된다. 1월이나 9월에 선거 국면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는 한일관계의 ‘통큰 결단’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내년 도쿄올림픽까지 강제징용문제의 현금화조치가 미루어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한일 대립은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일관계의 단계적 포괄적 접근
한일관계 개선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양국 정상의 의지와 결단이 필요하다. 톱다운 방식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려면 국장급 대화 채널보다는 청와대와 일본 관저가 직접 나서야 한다. 청와대와 일본 관저의 솔직한 대화는 한일정상회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한일 양국의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서라도 한일정상의 만남은 한일관계 갈등 관리와 해법을 분리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즉 강제징용문제의 해결을 모색하면서도 악화일로에 있는 한일관계 갈등 관리가 정상회담의 우선적 과제가 되어야 한다. 그 대화의 과정에서 일본은 대한수출규제조치를 해제하고, 한국은 현금화 조치를 유예해야 한다. 그리고 일본의 올림픽에 한국이 기여하면서 한일 화해의 장면을 만들어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강제징용문제에 대해 한국내 정쟁의 빌미가 되지 않으면서 일본의 불신을 없애는 묘안이 필요하다. 하나의 대안으로서는 강제동원 판결 배상금을 한국 정부가 우선 대위변제하면서 한일기금이나 한국의 여야가 합의한 특별법을 만드는 것이다. 동시에 일본도 피해자들에게 사죄와 반성을 보여야 한다. 이러한 단계적이고 포괄적인 접근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만 해결책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
손꼽히는 한일관계 전문가다. 도쿄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도쿄대 총합문화연구과와 와세다대 정경학부에서 객원교수를 지냈다. 세종연구소 소장과 현대일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