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제] 얼마 전에 본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펀딩을 위해 경연에 나선 한 스타트업(신생기업)이 선택의 기로에 섰다. 기술 정확도로 승패가 갈리는데 아주 조금만 조작하면 경쟁자를 누를 수 있는 것이다. 조작을 하면 우승과 동시에 상당 금액의 투자 유치를 기대할 수 있고 들킬 염려는 없다. “아주 조금만···.” 유혹의 목소리는 거부하기 어려울 만큼 강하지만 스타트업의 책임자는 조작하기를 거부한다. “아니야, 그 조금 때문에 나머지도 모두 거짓이 돼”라는 말과 함께.
행동경제학의 ‘휴리스틱(어림짐작·직관)’ 이론에 따르면 한 번의 거짓말 때문에 나중의 진실까지 거짓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크다. 흔히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보다는 자신 나름의 기준이나 선입관으로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 번 거짓말에 속은 사람은 두 번은 속지 않으려고 ‘또 거짓말일 거야’라는 일종의 방어용 선입견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정치야말로 휴리스틱이 가장 잘 작동하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일례로 지난 2010년 이명박 정부 때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는 어설픈 말 한마디 때문에 낙마했다. 당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김 후보자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과 2007년 하반기 이전 일면식도 없었다고 말했는데 2006년에 김 후보자와 박 전 회장이 함께 찍은 사진이 나와버린 것이다.
이렇듯 정치인의 허언은 치명적이기 마련인데 요즘은 그렇지도 않다. 심지어 더불어민주당은 누가 봐도 선거용인 동남권 신공항 이슈를 꺼내놓고 정치적 의도가 없다며 태연히 부인하는 일까지 나타내고 있다. 하기야 민주당은 국민 앞에 약속한 당헌까지 바꾸며 보궐선거에 집착하는 민망한 모습을 이미 보여줬다. 민주당은 2015년 10월 경남 고성군수 재선거에 귀책사유가 있는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이 후보자를 낸 것을 성토하면서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가 부정부패 사건 등 중대한 잘못으로 직위를 상실하여 재보선을 실시하게 된 경우 해당 선거구에 후보자를 추천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당헌에 넣었다. 이는 당시 당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의 약속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여당은 거듭된 약속 위반에도 치명상은커녕 정치적 실속을 챙겨왔다. 4·15 총선 때는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의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을 그렇게 욕하더니 자신들도 비례정당을 만들었다. “헌법 정신과 개정 선거법의 취지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퇴행적 정치 행위”라고 퍼부었던 비난을 스스로 뒤집어쓴 꼴이었다. 그래도 총선에서 대승한 민주당은 21대 국회 전반기 의장단과 17개 상임위원회 위원장 구성 때 야당과 협상을 하는 듯 시늉만 하다가 결국 모든 자리를 독식해버렸고 3차 추가경정예산안의 졸속 처리와 ‘임대차 3법’의 단독 처리 등을 강행했다.
급기야 민주당은 2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 소위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개정안 심사를 통한 또 하나의 정치적 잇속 챙기기에 돌입했다. 같은 날 공수처장추천위원회 4차 회의가 다시 결론 없이 끝날 경우 법 자체를 바꿔 공수처장추천위의 의결정족수를 7명에서 6명으로 정해 보장됐던 야당의 비토권을 무력화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야당의 비협조를 빌미로 공수처의 중립성 장치를 없애 정치적 악용 수단으로 활용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런 식의 정치적 꼼수가 거듭된 탓에 사법 개혁의 상징이라는 공수처의 진실성까지 의심받게 된 것을 여당은 알지 못한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직무 정지 명령을 내린 것 또한 정권의 무너진 신뢰 때문에 반대 세력 찍어내기라는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고 있는 것 아닌가. 오죽하면 여당 내부에서까지 “공수처를 출범시키고 윤석열을 배제하면 형사 사법의 정의가 바로 서느냐”는 탄식이 터져 나오겠는가. 국민이 믿지 않으면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다(民無信不立, ‘논어’).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문재인 정부와 여당에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국민 신뢰의 회복이다. 진실이 아니라면 야당 탓도, 그 어떤 정치적 수사도 약속 위반의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음을 이제라도 깨달아야 한다. hnsj@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