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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의 이 길을 따라가면] 부석사와 소수서원이 아닌 영주시를 찾아서 덧글 0 | 조회 92 | 2020-11-28 13:27:52
여리네  

편집자주

도시는 생명이다. 형성되고 성장하고 쇠락하고 다시 탄생하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우리는 그 도시 안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도시란 무엇일까, 도시의 주인은 누구일까. 문헌학자 김시덕 교수가 도시의 의미를 새롭게 던져준다.

<5> 경북 영주시 근대역사거리와 주변

오늘은 경상북도 영주시의 '영주 근대역사거리'와 그 주변을 걷는다. 영주 근대역사거리는 특정한 건축물 한 동이 아니라 선·면 단위로 문화재가 된 사례로 유명하다. 군산과 목포에도 마찬가지 성격의 문화유산 지역이 존재한다. 1941년에 개업한 영주역이 1973년에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기까지, 구 영주역 주변에는 철도관사촌, 영주동 근대한옥, 영광이발관, 풍국정미소, 영주제일교회 등의 근현대 건축물이 세워졌다. 이들 건축물과 그 주변 지역이 일괄적으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직선거리로는 800m 정도 된다.

그런데 나는 영주 구도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800m의 영주 근대역사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영주 근대역사거리의 동쪽 끝인 영주제일교회에서 북쪽으로 올라간 산기슭에는 숫골이라는 지명이 전한다. 숫골이라는 지명은, 1945년 광복과 분단에 즈음하여 대한민국 영토로 귀국하거나 월남한 사람들을 이곳에 수용했기 때문에 수용소골(收容所谷)이라고 부르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한다(영주시민신문 2019년 2월 18일자 <영주의 진산 철탄산(鐵呑山) 아랫마을 ‘숫골’>). 1961년 7월 11일의 영주 대홍수 소식을 전하는 ‘매일신문’의 수해상황도에도 현재의 숫골 위치에 ‘수용소’라는 표시가 되어 있으므로(영주시민신문 2020년 4월 24일 <의지와 노력으로 절망을 이겨낸 꿈과 희망의 길>에서 재인용), 숫골의 어원이 수용소골이라는 추정은 타당해 보인다. 그렇다면 숫골은 20세기 중기 한반도의 역사를 증언하는 귀중한 무대인 것이다. 현지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수용소가 있던 핵심 지역은 현재 아파트로 재건축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현지에 가 보니 아파트 주변으로 옛 수용소골 시절의 모습을 연상케하는 건물들이 산골짝에 층층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편, 근대역사거리는 동쪽으로 영주제일교회에서 끝나지만, 영주제일교회로부터 영주초등학교 - 영주향교 앞 - 영주여자고등학교 앞 - 영주동산교회로 나아가는 도로가 이어지다가 영동선 철도와 만난다. 구 영주역 철도관사촌부터 영동선 철도까지의 거리는 1.3㎞ 정도이다. 그런데 영주여자고등학교의 동쪽에는 건축물대장상 1961년에 일괄적으로 지어진 건물군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1961년 7월 11일에 영주시에 큰 피해를 입힌 영주 대홍수로 인해 발생한 이재민들을 집단 이주시킨 재건주택으로 보인다. 이때의 영주 재건사업은 1961년 5월 16일의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영주제일교회에서 재건주택에 이르는, 영주 근대역사거리에 포함되지 않는 도로 주변에도 적잖은 수의 근현대 건축물과 일제 강점기 시대에 세워진 이정표(里程標)와 같은 역사 문화 유산이 산재해 있었다. 하지만 영주시와 문화재청은 영주제일교회 동쪽 바깥의 거리에서 재건축・재개발이 많이 진행되었다고 판단한 듯, 이 부분을 근대유산의 범위에서 제외했다.

구 영주역 철도관사촌부터 영동선 철도변까지 걸으며, 20세기의 문화 유산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곤란한 일인지 새삼 느꼈다. 한국 전체에서 보았을 때 결코 큰 규모가 아닌 영주시에서도, 1.3㎞ 정도의 짧은 도로 주변을 역사 문화 지구로 지정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재건축・재개발과 철거는 활발히 진행중이다. 하물며, 영주시보다 더욱 큰 규모의, 인구나 도시 규모가 성장하는 도시에서 건물군, 길, 도시의 한 블럭을 역사 문화 지구로 지정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은 더욱 곤란한 일이다. 인천, 제천, 수원, 원주, 장항 등의 도시를 답사하면서도 마찬가지 문제의식을 느꼈다. 이들 지역에서는 영주나 군산의 사례를 들면서 건물군, 길, 도시의 한 블록을 보존하자는 주장을 하고는 하지만, 반대로 나는 영주에서 '선택과 집중'의 중요성을 느꼈다.

도시에서 모든 역사 문화 유산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지킬 필요도 없다. 도시는 박물관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에, 특정 원주민의 추억을 지키기 위해 도시의 성장을 정지시킬 수는 없다. 구도심이 활기를 유지하기를 바란다면, 주민이 살 수 있는 기반 시설의 신축과 정비가 부단히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특정한 건물이나 길, 블럭이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들 역사 문화 유산이 한국 사회에서 지니는 의미, 또는 그 지역에서 차지하는 특별히 탁월한 가치가 보편적인 차원에서 주장되어야 한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름답게 느껴지는 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스탤지어만 붙잡고 있으면, 더 많은 시민이 더욱 쾌적하게 살 수 있는 도시의 건설을 방해하게 된다. 그 결과는 구도심의 황폐화・슬럼화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도심에서 800m의 도로만을 근대역사거리로 선정하고 도로변의 건물군과 블록을 집중적으로 정비하기로 한 영주시는 선택과 집중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근대역사거리를 포함한 1.3㎞의 직선도로를 걸으면서, 영주시의 선택과 집중에서 배제된 숫골과 재건주택이 나의 눈에 띄었다. 길의 양측에 자리한, 근현대 영주시가 경험한 중대한 사건인 해방・분단과 1961년 영주 대수해가 근대역사거리의 범위에서 제외되어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영주라는 도시가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 또 하나의 중대한 사건인 1941년 7월 1일의 중앙선 영주역 개설 역시, 현지분들께는 영주시 발전의 저해 요인으로서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중앙선・영동선・경북선 철길이 영주시 곳곳을 달리고 있어서 도시가 분단되어 있다는 주장, 그리고 철길들이 삼각형으로 교차하면서 외부로부터 고립된 일명 삼각지마을을 묘사하는 “철길에 막혀 설움받던 영주 삼각지 마을”이라는 표현 등이 그렇다.

하지만 영주시 외곽의 농촌・산촌 지역에 위치한 전통적인 역사 문화 유산인 부석사・소수서원・무섬마을 등과는 달리, 영주 구도심을 오늘날과 같이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 만들어낸 핵심적인 요인은 영주역과 철도였다. 철도가 부설되었기에 영주에는 도시 규모에 비해 많은 시장이 설치되어 오늘날까지 활성화되어 있고, 연초제조창과 같은 공업시설이 들어서기도 했다. 따라서 영주역과 철도는 영주시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아니라, 영주시라는 구도심 그 자체인 것이다. 영주는 부석사와 소수서원의 고장임과 동시에, 철도와 공업의 도시이기도 하다.

또한 20세기 후반 영주의 모습을 결정지은 것은 1961년 7월 11일의 영주 대홍수와 복구 작업이었다. 수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영주시와 박정희 정부는 단순히 피해를 복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도심 서쪽에 자리한 가흥리산을 200m 깎아, 수해를 입힌 서천(西川) 물줄기를 직강화(直江化)하고 중앙선 철길을 이설하는 도시 개조 사업을 실시했다(대한뉴스 359호 <영주 수로 변경공사> 1962년 4월 7일). 서울에서 한강의 본류와 지류를 바꾸고 본류의 일부를 석촌호수로 남기는 토목 공사가 이루어진 것이 1971년이었으니, 도시를 관통하는 강의 흐름을 바꾸어 수해를 예방하는 작업은 영주가 서울보다 10년이나 빨랐던 것이다.

5・16 군사정변 이후 최초의 대규모 토목 재건사업이다보니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관심이 컸고, 서천 직강화 공사 준공식에는 주한미대사와 유엔군사령관 등이 참석할 정도로 이 토목사업은 주목받았다. 박정희 정권 시기의 새마을운동이 청도・포항・구미 등 경상북도 각지에서 기념되고 있지만, 그 근원은 5・16 군사정변 직후에 이루어진 영주의 수해 복구 작업과 서천 직강화 공사였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박정희 시대의 공과(功過)를 따지기에 앞서, 그 시기에 어떠한 사실이 있었는지는 사실 그대로 기록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옛 강물이 흐르던 동쪽 구성공원에는 재건 공사를 지휘한 이성가 장군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새 강물이 흐르게 된 서쪽 구학공원에는 박정희 의장이 식수(植樹)했음을 전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동북쪽의 하망동 재건주택에서 시작하여 서남쪽 방향으로 이성가 장군 기념비, 박정희 의장 기념식수, 그리고 직강화된 서천까지 영주의 현대사를 전하는 ‘재건의 길’은, 오늘날 영주 시민들 사이에서도 거의 잊힌 것으로 보였지만 좀 더 기억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두번 다시 수해를 입지 않기 위해 구도심 서쪽의 서천을 직강화한 경험은 그 후로도 기억되어, 1980년대에는 구도심의 동쪽을 흐르는 원당천의 물줄기를 바꾸는 토목 공사가 이루어졌다(영주시민신문 2019년 1월 11일자 <류창수의 잊혀진 영주역사이야기[25・26] 원당천(元塘川)수로변경공사(1・2)>). 다른 도시들이었다면 하천을 복개하고 말았을 것을, 1961년의 수해와 직강화 공사라는 경험을 지닌 영주시는 물길을 바꾸는 선택을 한 것이다. 전국적으로 보았을 때 결코 큰 규모의 도시라고는 말할 수 없는 영주라는 도시가 보여준, 수십년에 걸친 토목(土木)에의 의지가 강렬하게 느껴진다. 오늘날의 영주시 구도심을 만들어낸 20세기 중후기의 철도와 수해 재건 사업을 ‘건설과 재건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서 기념해도 좋겠다. 나에게는 부석사와 소수서원이라는 불교와 성리학 유산만큼이나 가치있는 이 ‘건설과 재건의 길’이 존재하는 영주라는 도시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도시는 관광객을 위한 곳이 아니라 주민을 위한 곳이다. 관광객에게 어필하기에 앞서, 주민들이 살기 편하고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한반도의 근현대 역사에 관심을 가진 타지인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부석사와 소수서원은 물론 훌륭한 문화유산이지만 어디까지나 한반도 역사에서 과거 시대의 모습을 전하는 존재이다. 1941년의 중앙선 영주역 개통과 함께 한반도 철도의 한 중심이 된 결과 많은 수의 시장과 공장을 지니게 된 철도도시 영주의 흔적들, 그리고 1961년 영주 대수해로부터의 재건의 흔적들이야말로 영주의 오늘날을 만들어낸, 동시대적 가치를 지니는 문화재이다. 이 두 가지 부류의 역사 문화 유산 가운데 어느 한쪽만 강조하지 말고, 양쪽을 모두 효과적으로 어필하는 방법을 영주 시민들께서 모색해주신다면 기쁘겠다.

마지막으로, 이번 답사에서는 영주시의 공무원인 김영진 선생님의 도움이 컸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토론자로 포럼에 초청해주신 영주시 도시재생지원센터와 동국대 건축학과 한광야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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